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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개발자여 단결하라

살아가는 이야기

by 사람사는 세상 만들기 2007. 9. 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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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몇 달 전 ‘내 꿈은 골방에 처박힌 프로그래머’란 제목의 글을 썼을 때의 일이다. 컴퓨터에 빠져 가족과도 소통하지 않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였으나 제목에 ‘프로그래머’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서인지 댓글에는 ‘프로그래머’ 혹은 ‘개발자’란 직업에 대한 소회가 많았다. “절대 프로그래머 되지 말라고 뜯어말리고 싶다” “컴퓨터를 전공한 것부터 후회한다”는 내용들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인터넷 창을 닫았더랬다.

그러다 올여름, 올 것이 왔다. 한 프로그래머가 “2주일간 사흘 집에 갔다, 옷 갈아입으러”라며 쓴 사직서와 ‘야근 개발자의 애환 동영상’ 1·2편이 놀라운 흥행 성적을 낸 것이다. 네티즌들은 ‘나도 그렇다’는 동조의 글부터 ‘노동자를 위한 당인 민주노동당은 뭐하냐’는 식의 논평까지 내놓으며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2000년 전후로 늘 ‘유망직종’이라 소개되던 정보기술(IT) 업계의 이미지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월·화·수·목·금금금 계속되는 노동과 갑·을·병·정·무·기…로 이어지는 하청 관계 속 척박한 근무 환경에 대한 보도도 이어졌다. 개발자들을 만나봤다.

A는 대학교 2학년 때 휴학을 하고 병역특례 업체에 프로그래머로 들어갔다. ‘병·정’ 정도의 위치에 있던 그 회사는 터무니없는 작업 기간과 액수의 프로젝트도 돈만 되면 들고 와 프로그래머들을 닦달했단다. 야근은 물론 주말에도 나와야 했다. 그렇게 일해도 워낙 소프트웨어(SW)가 싸게 들어가다 보니 회사는 늘 어려웠고 급기야 월급까지 밀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군대에 가야 하나’ 하는 걱정에 돈도 받지 않고 자르지만 말아달라며 일을 했단다. 한번 ‘지옥’을 경험하자 프로그래머는 더 이상 매력적인 직업이 아니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던 그는 결국 의대에 진학하겠다며 학교를 그만뒀다. “컴퓨터공학과 졸업자의 기피 직업 1순위가 개발자”라는 말도 주저 없이 한다.

일찌감치 일본으로 떠났던 개발자 B씨도 요즘 고민이 많다. 한국의 중소 시스템통합(SI) 업체에서 근무하다가 근무 환경이 너무 나빠 사직하고 일본을 선택했던 그다. 일본 현지의 한국 업체에 소속돼 IT 기업으로 파견을 나가는 그는 한동안 근무 환경이나 보수에 만족했다. 그러나 한국에 ‘컴퓨터+일본어’ 속성 학원이 난립하면서 개발자들이 쏟아졌고 그들의 공허한 실력은 일본 내 한국인 개발자의 평가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게다가 중국·베트남 등에서 개발자들이 몰려와 한국 개발자들의 입지를 좁혔다. ‘회사-집’만을 오가며 열심히 했지만 올해 말쯤에는 한국에 들어와 다른 직업을 찾아봐야겠다며 한숨을 쉰다.

IT 업체가 워낙 하청에 하청을 두고 규모도 작은 곳이 많다 보니 노조를 구성해 할 말을 제대로 해온 개발자들이 드물다. 그저 개발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일을 시작했다가도 빡빡한 일정 속에 인정 한번 제대로 못 받고 착취당하다 보면 스트레스만 쌓여가는 식이다. 현재 민주노총 산하에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이 있지만 이런 산별 노조가 있다는 사실도 잘 모른 채 일하고 있는 것이 개발자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조합원 수도 100명 수준이다. 일부 개발자들은 이번 기회에 IT인들이 모여야 한다며 8월 중순 오프라인 모임을 기획하기도 했다. 척박한 환경이 개발자들 스스로 뭉쳐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 셈이다. 뭔가 전체 시스템을 뒤흔들 만한 변화를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오랫동안 ‘IT 강국’ ‘유망직종’ 등 허울 좋은 이름 아래 감춰졌던 눈물과 분노가 변화를 가져올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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